청동기 수렵채집인의 지구별 여행

지구별 대한민국 살아오기

by b.run

살다보니

2014년이었던가요. 유행어로' 헬조선'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근본적으로 살기가 어렵다 생각한 국민들에게 공감을 받았던 표현입니다. 500년 기록의 조선왕조와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말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푸념이 풍자에 이른 이 어휘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은

'애초에 그리 어려운 곳이었는지', '그렇게 더 어려운 곳이 되려는지'. 생각해보며 글꼭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생존과 야만의 역사를 지나서 사람 사이에 사람다운 사회라는 합의를 통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먼 인간, 태초의 기원을 쫓다보면 삶의 순환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세대는 어떤 모습으로 이제껏 이어오게 되었을까요. 

현생 인류는 중기 플라이스토세 Pleistocene 홍적세로 불리는 약 3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발원하여 세계 각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순록, 매머드, 야생마, 오록스, 곰 등을 사냥했고 식물을 채집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름에는 천막을 쳤고, 겨울에는 오두막을 혹은 붙박이 집을 짓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0만 년경, 인류는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만년 전, 기온이 올라가면서 홀로세 Holocene가 찾아옵니다. 따뜻해진 덕분에 빙하가 물러나 동식물의 공간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더욱 습윤해져 열대 우림이 늘어나고 한편으론 툰드라 지역이 좁아져 사람 살 땅도 넓혀졌습니다. 사람이 살아볼만한 이 즈음의 인류는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조화된 공동체가 불가사의에 대한 같은 믿음, 종교를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대략 1만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이제는 과학이 지식의 지평을 열어 지구 대륙의 거의 모든 곳에 인간이 살 수 있습니다.

사유재산이 인정되면서 불평등과 소득격차가 생겨났습니다. 풍요 한켠에 놓여진 빈곤을 보며 사람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인간으로 번영하려는 바램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도시는 치밀하게 우리들의 관계를 돕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쉽게, 더 다양하게, 더 많이 교류합니다. 서로 대신할 존재가 늘어나면서 이젠 사람이 흔할 세상을 걱정하는 일이 남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곳은 헬일까요? 생존을 위한 야만의 시대가 인간을 위한 문화의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인류의 문화는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인류 자신의 진화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직 우리의 DNA에 세겨진 생존의 몸부림에 홀로서기가 어려운 이 세상은 지옥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단서는 인간이 살아온 길에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야만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왔기 때문에 고대 인간도 이를 어떻게 견뎌 살아왔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그간의 삶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반만년 전의 고대를 전해주는 흔적이 있습니다. 
 

5000년 전 아이스맨, Ötzi

Ötzi 외치는 1991년 9월 19일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국경 사이 알프스 산맥, 외츠 계곡의 Niederjoch 빙하 얼음 속에서 발견된 약 5300년 전의 중년 남성입니다. 시신뿐 아니라 유물까지도 5300년 전 상태 그대로 고스란히 남겨져 당시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금석병용기로 구리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문자가 등장하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 수만명이 사는 도시와 거대 신전들이 들어서고, 인도 인더스 문명도 이 시기에 발전합니다. 160 cm에 50 kg, 이 다부진 체격을 갖춘 갈색머리의 중년 남성은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던 농경수렵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남겨진 그의 육신은 반만년이 지난 현대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이 아닌 당시의 지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Ötzi 외치의 흔적은 시대에 존립하는 인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시대에 맞는 양식을 갖추어 기본을 누리며 생존합니다. 그러나 두발로 살아가는 하루의 기본은 같습니다. 그가 지금에 걸맞는 삶을 갖추어 나가는데에 지금의 터전도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Ötzi때로부터 남겨진 이야기와 삶의 양식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다음의 5000년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필자는 앞선 물음에 답을 얻고자 외치 Ötzi를 지금 사는 이곳으로 되살려내기로 했습니다. What if라는 가정이므로, 글은 소설의 형식을 띌 것입니다. 5300년 전 죽은 필멸자 必滅者를 되살려 냈으니 작가로서의 나는 불멸의 半神 Demigod이 될 수 밖에 없었음에 양해를 구합니다. 현대 환경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고대의 얼음 인간 외치 Ötzi는 아마도 완전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가 우뚝 솟은 건물들,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들, 그리고 그의 상상 이상의 옷을 입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외치 Ötzi가 그 광경을 볼 때, 첫 반응은 두려움, 경이로움,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진보된 도구들, 많은 인간들, 그리고 그 주변의 언어들과 소리들의 불협화음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고요했던 고대의 존재와 현대 세계의 혼돈의 대조는 극명할 것입니다. 

외치 Ötzi와 현대인의 만남은 매혹적인 교류가 될 것 같습니다. 언어 장벽을 감안할 때, 의사소통은 몸짓과 표현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이 예기치 않은 방문자를 이해하려고 할 때, 원시적인 도구와 복장을 한 외찌는 몸짓을 통해 산을 가리키고 사냥이나 채집 행동을 흉내 내며 그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겠지요.

소통하는 방법이 확립되면, 삶, 생존, 자연에 대한 외찌의 관점은 현대의 생활양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룰 것입니다. 생존 기술에 대한 그의 통찰력,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단순한 삶의 방식은 그를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대화들은 시간, 기술, 그리고 사회가 진화해온 방식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외찌의 존재는 역사, 인류학, 그리고 인류 문명의 진화에 대한 논의를 촉발할 것입니다. 그의 고대 관습, 의식, 그리고 생존 기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인류학자와 역사가들에게 금맥이 될 것입니다. 

5300년 전과 지금 세계의 방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치 Ötzi와 현대의 개인들 사이에는 상호 호기심과 존중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외치는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과 생존에 대한 추진력을 보는 것을 보면서 심지어 친족감이나 인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세계의 만남은 인류 역사의 복잡성과 사회의 진화에 대해 더 큰 고마움을 알리며, 매우 상이한 두 시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동시대를 마주한 우리는 잿빛 콘크리드 속에 있습니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월 단위로 신용카드를 저글링하는 삶에 놓여 있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 지금 세상은 5천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합니다. 지구별, 이 곳은 삶의 기본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때로는 유토피아로 한편으로는 디스토피아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제 저는, 

지금 살고 있다는 것.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
인간으로 함께 하는 것.
저녁 만찬이 마련된 것.
쉼과 안식을 누리는 것.
 
이런 일들이 어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지.
이런 일들을 언제나 손쉽게 할 수 있는지.
이런 일들로 세상이 체워질 수 있는지.
 
모두 확인하고자 이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재밌게도 필자의 나이는 청동기 수렵인 Ötzi와 비슷한 40대 중반으로 5300년 전, 초기청동기 시절의 Ötzi가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어떨까라는 흥미로운 관점을 갖기로 했습니다. Ötzi가 살만한 곳이라면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그가 살기 좋다 소문난 한국에 여행을 오게되어 영광입니다. 그를 데리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왼쪽 위에는 메뉴가 있습니다. 위에는 그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 '일지' 편과 중간에는 그가 나와 함께하는는 '대화' 편이, 마지막에는 불멸의 반신으로 인류의 역사를 목격한 내가 관찰하는 그의 모습으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합니다.

 

모든 대화에 참고할 만한 자료는 말미에 넣어둘 생각입니다. 이런 대화글이 혹여나 사람들에게 망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블로그 제목에는 '소설'이라는 단정을 붙여 놓았습니다. 지루하지만 흥미로울 대화의 전개가 동시대를 넘어선 시각의 확장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며, 다만 유사과학이나 유사역사학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최대한 변경지대의 과학과 역사로 소설을 기술하고자 합니다. 관련한 옳은 지적은 언제나 환영하고 싶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소설 쓰기가 이 세상에 누가되지 않도록 초심을 다져봅니다.

 

 


참고문헌

  1. Wikipedia Contributors. Ötzi.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Ötzi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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